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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4·19 혁명 60주년기념으로 '어쩌다 어른' 프로그램 166화가 재편성되어 방송이 되고 있었다. 4·19 혁명에 관한 내용인데, 그동안 역사 시간에 무엇을 했나 싶기도 하고,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화가나고 답답했다.

 

 

바로 오늘날인 2020년은 4·19혁명 60주년이자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4·19부터 촛불 혁명까지 민주화의 역사 60년에는 세 번의 승리한 시민혁명이 자리잡고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부정선거를 통해 대통령과 부통령을 조작했으며, 이에 대한 내용으로 4·19 혁명이 실시되었다. 그해 1960년의 4·19. 부정선거를 자행한 책임을 지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다.

 

 

수송국민학교 학생 강명희, 《나는 알아요》

아! 슬퍼요
아침하늘이 밝아 오면은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놀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하늘과 저녁 놀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들였어요.  
오빠와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이러한 역사적 전환을 이끌어낸 주역은 바로 국민이었다. 또한 한국전쟁이 휴전 협정으로 일시적으로 총성이 멎은 지 불과 7년밖에 지나지 않았던 1960년에는 이미 국민들 사이에 민주주의를 향한 강렬한 열망이 들끓고 있었다. 민주화를 위한 요구는 적어도 5년 전부터 이미 있어 왔던 것이었다.

 

 

물론 오늘날의 교육수준에 비교할 수 없지만 당시의 교육열은 사실상 "붐" 에 가까운 것이었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이승만정부의 국가 총예산의 평균 10.5%는 교육 관련 지출이었다. 이 외에도 국민학교(초등학교) 의무교육제가 채택되었으며 또한 빈민층일수록 학구열은 더욱 높았다. 그 이유는 교육을 통해 그 누구라도 신분이 상승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4·19혁명의 발단이 된 것은 3·15부정 선거였다. 그것은 국민의 참정권을 짓밟는 반헌법적 행위였다. 1898년 독립협회 주도로 의회 개설 운동이 일어났지만,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대한 제국은 전제군주정인 채로 막을 내렸다.

 

이후 일제 강점기 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에 참정권이 규정되었고, 나라를 잃은 국민은 선거권과 피선거권 등을 포함한 민주적 절차를 훈련하여 참정권을 누리는 독립의 날을 꿈꿔왔다. 

이러한 열망은 1948년 5월 10일 치러진 제헌선거에서 95.5%의 높은 투표율로 이어졌다. 그만큼 참정권은 국민의 독립과 자유를 상징하는 소중한 권리였다. 


민주주의에 대한 참정권의 권리 

 


1960년 이승만 정부는 식민지배의 긴 터널을 거쳐 마침내 국민이 누렸던 소중한 참정권, 즉 주권확인을 위한 정서를 가볍게 여겨 제4대 대통령 및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부정선거를 획책했다. 집권여당인 자유당은 사전 투표 40%와 3인 5인 투표, 유권자 명단 조작, 완장 부대 동원 위협, 야당 참관인 축출, 투표함 교체, 투표용지 조작 등 각종 부정선거 수법을 모의했다. 

비합리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시위의 시작은 2월 28일 대구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벌인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장면 유세일이 일요일이었는데 당국에서는 학생들이 유세장에 갈 수 없게끔 '영화 관람'이나 '추가시험' 등의 명목으로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강제로 등교하도록 지시했던 것. 이에 반발한 경북고 학생들이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 고 가두시위를 벌였고 이에 호응한 대구지역 여러 고등학교 학생들은 27일 시위를 벌였다. 구체적으로는 대구고, 경북고, 경북여고, 경북대사대부고, 계성고 등 8개 학교 총 1200여 명이었다.

다음 날인 28일, 당시 경북고 3학년인 학생회장 이대우는 "부정에 항의하고 신성한 권리를 지키는 것"을 요지로 하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같은 경북고 3학년의 중퇴생이던 하청일이 초안을 작성한 결의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류 역사 이래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가.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느 역사 속에 끼어 있었던가. 우리는 배움에 불타는 신성한 각오와 장차 동아를 짊어지고 나갈 꿋꿋한 역군이요, 사회악에 물들지 않은 백합같이 순결한 청춘이요, 학도이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치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처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1960년 3월 1일 서울종합운동장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는 누가 이기느냐가 아니라 국민주권 행사가 공정하게 이뤄지는지가 중요하다며 참정권이 민주주의의 기본권임을 강조하며 유인물이 뿌려졌다. 선거 전날인 3월 14일 서울지역 야간 고등학생들은 헌법 1조를 규정한 유인물을 나눠주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며 시위했다.

3월 15일 노골적인 부정 선거가 실시되었을 때 예상대로 전국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마산에서는 경찰이 시위대 수천 명을 향해 발포해 12명이 숨졌다. 그리고 27일 만인 4월 11일 마산에서 실종된 고교생 김주열의 시신은 마산 앞바다에 최루탄이 박혀 있는 참혹한 모습으로 떠올랐다. 

 

 


성난 마산 시민 2만여 명이 마산경찰서와 시청에 난입해 경찰서를 덮쳤다. 이날 처음으로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촉구하는 구호가 등장했다. 또한,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민주 역적 몰아내자'며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다가 돌아오는 길에 깡패들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19일 오전 고려대 학생 습격 사건을 조간 신문으로 본 서울 시내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오후에는 중,고등학생들이 합류했다. 10만여 명이 시가지를 가득 메운 채 시위를 벌이고 있는 가운데 경찰이 경무대 앞에서 발포했다. 부산과 광주에서도 시위대 100여 명이 숨졌다. 사람들은 그것을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렀다. 

 


그로부터 엿새 뒤인 4월 25일, 258명의 대학 교수들이 '학생들의 피를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서울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날 전국 각지에서 모인 시민들도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벌였다. 마산에서는 할머니 시위대가 나타나 "죽은 학생을 책임지고 이 대통령을 퇴진하라"고 외쳤다. 


다음날인 4월 26일 새벽 5시 통행금지가 해제되자 학생과 시민들이 광화문 일대로 몰려들었다. 오전 9시 45분쯤 탑골공원에서 이승만 동상이 철거돼 "부숴버리자"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시위대 수가 10만 명으로 급증한 오후 10시 20분경 이승만은 시민 지도자와의 회동에서 국민이 원한다면 사퇴하겠다고 약속했다. 일주일 만에 '승리의 화요일'이 찾아왔다. 

국회는 이날 오후 2시 이승만 대통령 즉각 사퇴와 대통령 및 부통령 재선, 내각책임제 개헌 등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민주적 절차의 정당성을 훼손하고 참정권에 대한 국민의 주권의식과 정서를 가볍게 했던 이승만 정권은 이처럼 엄청난 국민의 반발에 부딪혀 무너졌다. 

 



1960년 4·19혁명 이후 60년 동안 광장에서 국민이 스스로 주권을 실현하는 시민혁명의 역사를 만들었다. 목숨을 걸고 진정한 국부(國富)의 나라를 만든 것은 희생자들 덕분이었다.

 

승리의 역사에 묻힌 희생의 역사를 돌아보며 국민 주권을 실현하는 출발점인 4·19혁명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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